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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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1 23

 

엄마는 기억 못 하겠지만,

어릴 때 구리시장 노상에서 갈색 작은 대야에 담긴 도라지 껍질을 긁어내고 계신 노인을 보고 내가 불쌍하시다,고 하니까 뭐가 불쌍하냐 도라지 팔고 계시는 건데,라고 했다. 자라면서 그 말이 내게 어떻게 작용했는지 이것도 엄마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잊지 않고 있어

 

아 이건 기억할까,

또 어릴 때 엄마랑 동네 어디를 걷다가 매일 지나는 놀이터 의자에 잠깐 앉았는데, 앉은 시선으로 정면에 막 짓고 있는 낮은 건물이 있고, 골조 사이로 인부들이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고, 엄마가 저기 아빠다,라고 했다. 아빠가 일하는 모습을 처음 본 날이었다. 이렇구나, 생각하면서 엄마랑 나란히 앉아 있다가 다시 일어나서 집으로 온 것뿐인데 나는 그날 그 잠깐을 어느 영화 한 장면처럼 오래 기억하고 있네

 

기억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건 아니라서, 뭐가 불쌍하냐는 엄마의 말에 어떤 감정이 있던 건지, 왜 하필 아빠가 일하고 있는 바로 그 건물 앞 놀이터 의자에 엄마와 나란히 앉게 된 걸까 같은 생각은 다 큰 성인이 돼서야 하게 되었다. 그때 엄마는 그 노인의 노동이 특별해 보이지 않고 평범해 보였을 것이다. 그날 엄마가 저기 아빠가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냥 나는 어제처럼 그곳을 지나며 위험하겠다 시끄럽다, 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아빠의 노동 현장을, 그 현장에 있는 아빠 모습을 처음으로 본 날 아마 나는 느꼈을 것 같다.

머리로는 아직, 몸으로 먼저. 몸이 먼저 알고 성인이 된 후에 머리로.

노동은 공평하고 나도 그 안에 있다는 것을.

 

2022 01 17

지난해 마지막 달에는 그동안 본 영화 중 강렬한 타이틀로 기억하는 것들을 검색해 하루에 한 편씩 다시 보았다. 헝그리 하트, 레볼루셔너리 로드, 케빈에 대하여,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다 보고 나서 알았다. 내가 가진 여러 자아들이 밀접하게 일치한 시기였던 것 같다고..

마지막 날이 가까워 올 때쯤 본 것은 파워 오브 도그와 돈 룩 업. 역시 또 다른 느낌으로 강렬했다. 서부 시대와 현대 사회를 2021년 마지막 파멸의 영화로 고른 것부터.

그리고 올해 첫 영화는 램으로 시작했다.

마리아가 함께 춤 추자며 다가갈 때 아다가 보인 눈빛이 잊혀지지 않고.. 그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괴로우면서 슬프다. 종종 만지가 그런 얼굴을 할 때가 있어서...

나는 이제 그 장면으로 이 영화를 오래 기억할 것 같다.

 

 

어제 본 건 더 하우스.

스톱 모션은 아무리 재미없게 만들어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영화로서도 걸작이었다.

세 개의 단편이 한 집의 과거 현대 근미래로 이어진다. 벌레라면 기절부터 하는 내가 두 번째 이야기를 끝까지 볼 수 있었다는 게 올해의 좋은 시작이다. 벌레가 계속 나오고, 어느 순간부턴 그냥 화면 가득 잔뜩 나와 춤을 추는데 그야말로 미친 블랙 코미디였다. 왜냐면 내가 거기서 다 포기한 상태로 실소했기 때문에.. 그리고 현재 우리의 시점인 것도. 두 번째 편은 불쾌함을 견디고 엔딩을 봤을 때 가져가는 게 너무 많다.

마지막 이야기에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절망이고 희망이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안개가 걷혀서 정말 다행이야..

2022 01 15

 

막 성인이 되었을 때 나는 이미 세계를 다 알아버린 것 같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미래는 가망이 없고 인간은 한날 한꺼번에 멸망하는 수밖에 더 나은 답이 없어,라고 말하는 술자리는 너무 통쾌하고 멋있었다.

가망 없을 미래에 책임을 돌리고 그 시간에 숨어 지내는 것이 낭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이라는 걸 이제 매 순간 체감하는 진짜 어른이 되었고

다음 세대라는 무거운 이름이 아니어도 이곳에 함께 살고 있는 내 조카와 친구의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때 좀 더 알았어야 한다는 후회가 든다.

머리를 잘 써야만 최악을 면할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세계에 와 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게 내 40대가 감당해야 할 역할이라는 걸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되고.. 어쨌든 더는 상상 속에 숨어 살 순 없는 거라고.

2021 12 09

 

머리가 텅텅 비어있는 채로 어떻게든 해내고 있는 겨울이다.

어딜 가고 뭘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것들이 내가 원하는 만족스러운 시간을 채울 수 없다는 걸 나 자신을 제일 오래 겪은 나조차 완전히 설득하지 못했지만.. 그렇지만 역시 그런 것들이 내게 꼭 필요하지 않다는 건 몸이 알고 있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저 이 상태로 다시 이걸 해내고 나면 또 어떤 식으로든 달라져 있을 거라고, 그 모습도 내가 기꺼이 받아들일 거라는 정도만 일단 알고 있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