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記

2022 08 03

 

 

재인이는 어쩜 이렇게 말을 잘해.

그랬더니 저쪽에서 아빠가 너도 똑같았어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외할머니는 내가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는 나만 보면 늘 어린 시절 얘기를 했다.

너는 어릴 때 진짜 수다쟁이였다. 할머니! 할머니! 그러면서 막 달려 와서는 화장실에 이렇게 큰 괴물이 있어! 지가 봤다고 아주 거짓말을 얼마나 했나 몰라. 이렇게 말할 때 외할머니 얼굴도 항상 웃고 있었다.

 

 

스무 살이 넘어 엄마와 한 마디도 나누지 않던 긴 시기의 어느 여름날 아침에 어학연수 떠나는 친구를 배웅하러 인천 공항에 가서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시늉하며 이제 가라. 그래 안녕. 그러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 '엄마'라고 뜨는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면서 몇 번이나 계속 와도 받지 않았다.

좀 더 돌아다니다 어두워져서야 들어왔더니 집에 혼자 있던 오빠가 우리는 아침 첫 차로 홍천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빈소에서 오열하는 나를 보고 모두 속으로는 왜 저러나 싶었을 것이다. 몇 년 동안 찾아오지도 않아놓고 누가 보면 제일 애틋한 손주인 줄 알겠다고.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나도 알았다.

외할머니 영정 사진 앞에서 내가 생각한 것은 얼마 전 엄마가 책상에 펼쳐 두고 간 스누피 노트였으니까.

네가 말을 안 하기로 작정한 탓에 너무 답답해서 편지를 쓴다고, 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이 뒷장에 써봐라, 이렇게라도 말을 해보자고. 그렇지만 나는 그것도 거부했다.

아끼는 거라 쓰지 않고 두기만 한 그 노트 첫 장에 내게 할 말을 적고 있는 엄마를,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 다시 들어와 뒷장을 넘겨 보는 엄마를 생각하면서... 목이 상할 때까지 울었다.

지금 엄마가 어떤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동면 할머니가 도착하셔서 울고 있는 나를 안아 주셨다. 등 쓸어 주는 손길에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순간이 다 서러워져서 또 처음처럼 울었다. 모두에게 미안한 일인 걸 그 순간에도 모르지는 않았고...

누구보다도 외할머니에게...

 

 

울다 잠들었는지 깨었을 때 동면 할머니는 집으로 가고 안 계셨다.

조문객도 모두 돌아가서 적막한 한쪽에 이모들과 식구들이 모여 있었다.

민망해도 거기로 가 앉아 조금씩 서먹하게 한두 마디 입을 떼다가, 미아리 살던 둘째 이모 집에 놀러 갔던 이야기를 꺼내자 모두 깜짝 놀랐다.

어머 거길 기억하니?

그럼요. 가게에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 있었고 천장에 뚫린 나무 문 열면 바로 막내 이모 지내던 방이었잖아요. 그 방에서 나가면 마당이고 거기가 둘째 이모 집이었고요. 외할머니랑 이모네 집에서 나란히 누워 있었는데, 제가 할머니한테 눈 감아 보라고 눈앞에 뭐가 별처럼 반짝반짝 움직이지 않냐고 했더니, 야 눈을 감았는데 앞이 왜 보이냐 그러면서 막 웃으셨던 기억이 나요.

엄마가 옆에서, 쟤는 저런 걸 진짜 다 기억한다니까라고 했다.

 

 

다음날 기억난 것이 또 있었지만 말할 수는 없었다.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셨을 때 아마 나는 국민학교 저학년 정도였고 우리는 또 나란히 누워있었다. 이불을 나만 덮고 있어서 할머니 이불 덮어야죠라고 했더니, 나는 위엔 안 덮어, 갑갑해서 싫다고 하셨다. 겨울에도요? 어 겨울에는 불 때면 되니까 안 덮어. 그럼 배 아픈데? 아니 나는 배는 안 아파.

장지에서 흰 천을 덮은 관 위로 흙이 뿌려지고 있는 걸 가만히 바라보다가 우리가 나눈 이 대화가 생각났다.

갑갑해서 덮는 건 싫다고 하셨는데...

 

 

외할머니와의 기억은 전부 어린 시절뿐이고 그러니 아무 소용이 없다.

 

 

어릴 때처럼 함께 방에 누워서,

"할머니 요즘도 이불 안 덮고 자요?"

"어 아직도 갑갑해."

"그럼 할머니는 나중에 영원히 자야할 때 어떻게 잠들고 싶어요?"

이런 이야기 하는 상상을 해본다.

내가 계속 수다쟁이였다면... 떠오르는 기억들을 늦지 않게 써먹을 수 있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