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인이는 어쩜 이렇게 말을 잘해.

그랬더니 저쪽에서 아빠가, 너도 똑같았어.라고 말했다.

외할머니는 나만 보면 늘 어린 시절 얘기를 했다.

너는 어릴 때 진짜 수다쟁이였어, 할머니! 할머니! 그러면서 막 달려 와서는, 할머니 화장실에 이렇게 큰 괴물이 있어! 지가 봤다고 아주 거짓말을 얼마나 했나 몰라.

스무 살이 넘어 엄마와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명절에도 시골에 따라가지 않던 긴 시기의 어느 여름이었다. 어학연수 떠나는 친구를 배웅하러 아침부터 인천 공항에 가서 서로 부둥켜안고 이제 가라. 응 안녕. 그러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 '엄마'라고 뜨는 핸드폰 액정을 바라만 보며 몇 번이나 계속 와도 받지 않고 좀 더 돌아다니다 어두워져서야 집에 들어왔는데, 혼자 있던 오빠가 아침 첫 차로 홍천에 갈 준비를 하라고 했다.

빈소에서 오열하는 나를 보고 모두 속으로는, 몇 년 동안 찾아오지도 않아놓고 누가 보면 제일 애틋한 손주인 줄 알겠네, 왜 저러나 싶었겠지.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나도 알았다. 여기 오는 버스 안에서도, 영정 사진 앞에서도, 나는 외할머니를 생각하지 않고 얼마 전 엄마가 책상에 펼쳐 두고 간 스누피 노트를 떠올렸다.

네가 말을 안 하기로 작정한 탓에 너무 답답해서 편지를 쓴다고, 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이 뒷장에 써봐라, 이렇게라도 말을 해보자고. 그런데 나는 그것마저 거부했다. 아끼느라 쓰지는 않고 두기만 한 그 노트 첫 장에 내게 할 말을 적고 있는 엄마를,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 다시 들어와 뒷장을 넘겨 보았을 엄마를 생각하면서... 목이 상할 때까지 울었다.

지금 엄마가 어떤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동면 할머니가 도착하셔서 울고 있는 나를 안아 주셨다. 등 쓸어 주는 손길에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순간이 서러워져서 다시 또 처음처럼 울었다. 모두에게 미안한 일인 걸 그 순간에도 모르지는 않았다.

누구보다도 외할머니에게.

울다 잠들었는지 눈이 떠졌을 때는 조문객도 모두 돌아가서 적막한 한쪽에 이모들과 식구들이 모여 있었다. 민망해도 거기로 가 앉아서 서먹하게 한두 마디 입을 떼었다. 그러다 미아리 살던 둘째 이모 집에 놀러 갔던 이야기를 꺼내자 이모들이 깜짝 놀랐다.

어머 거길 기억하니?

그럼요. 가게에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 있었고 천장에 뚫린 나무 문 열면 바로 막내 이모 지내던 방이었잖아요. 그 문이 방바닥이 되는 거고. 방에서 또 나가면 마당이고 거기가 둘째 이모 집이었고요. 외할머니랑 이모네 집에서 같이 누워 있었는데, 제가 할머니한테 눈 감아 보라고 눈앞에 뭐가 별처럼 반짝반짝 움직이지 않냐고 했더니, 눈을 감았는데 앞이 왜 보이냐 그러면서 웃으셨어요.

엄마가 옆에서 말했다. 쟤는 저런 걸 진짜 다 기억한다니까.

다음날 기억난 것이 또 있었지만 말할 수는 없었다.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셨을 때 아마 나는 국민학교 저학년 정도였고 우리는 또 나란히 누워있었다. 이불을 나만 덮고 있어서 할머니 이불 덮어야죠라고 했더니, 나는 위엔 안 덮어, 갑갑해서 싫다고 하셨다. 겨울에도요? 어 겨울에는 불 때면 되니까 안 덮어. 그럼 배 아픈데? 아니 나는 배는 안 아파.

장지에서 흰 천으로 덮인 관 위로 흙이 뿌려지는 걸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날 우리가 나눈 이 말들이 생각나 버렸다.

갑갑해서 덮는 건 싫다고 하셨는데...

외할머니와의 기억은 전부 어린 시절뿐이고 그러니 아무 소용이 없다.

어릴 때처럼 함께 방에 누워서,

“할머니 요즘도 이불 안 덮고 자요?”

“어 아직도 갑갑해.”

“그럼 할머니는 나중에 영원히 자야할 때 어떻게 잠들고 싶어요?”

이런 이야기 하는 상상을 해본다.

내가 계속 수다쟁이였다면... 떠오르는 기억들을 늦지 않게 잘 꺼낼 수 있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