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記

2023 12 18

 

 

기차 시간 맞추려면 지금 바로 나가야 하는데 배에 붙인 핫팩이 사라져서 바닥을 다 둘러봐도 어디서 떨어진지 모르겠고, 혹시 변기에 빠진 거 모르고 물 내렸나?! 에이 그럴 리가... 혼자 횡설수설하는 나를 보고 철운이, 빠뜨린 거야 아닌 거야? 변기 막히면 아파트 전체에 대형 사고인데 빨리 생각해 내야지, 자기 몸에서 뭐가 떨어지는 걸 모르고 있으면 어떡하냐, 너 오늘 하루 종일 밖에 있어야 하는데 정신을 왜 그렇게 빼놓았니, 게다가 그게 신용카드 같은 중요한 물건이었으면 어쩔 뻔했냐, 그러면서 다그치듯 너무 몰아세우니까 가뜩이나 혼란스러운데 더 당황이 되고 그러다 속에 불이 난 거처럼 화가 났다.

뭐 어떡하라고 나 지금 안 나가면 기차 놓친다고!

 

 

핸들을 겪하게 잡은 철운이 시간은 또 왜 이래! 하면서 속도를 내는 바람에 심장이 몇 번이나 내려앉았다. 역에 도착해서 인사도 없이 차 문을 쾅 닫고 그러고 헤어졌다. 정말 1분만 늦었어도 못 탔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상태로 기차에 실려 있다가 용산에 도착해서 영풍문고 들르고 화장실도 갔다가 경의중앙선 타고 홍대에 가서 3번 출구로 빠져 나와 연희동까지 걷는 동안 조금씩 마음이 풀리고 차분해졌다. 

 

 

그래. 네가 왜 화내는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야...

내가 지금까지 잃어버린 줄 모르고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 많고 너는 그때마다 그걸 다시 찾거나 줍는 사람이니까. 나는 내가 잃어버리는 것들을 매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대로 사라져도 알지 못하거나 더는 상관없어 하는데 모든 일을 그렇게 대하는 내 태도에 화가 나는 거지...

결국 핫팩을 찾은 것도 철운이었다. 언제 베란다에 흘렸냐...

집에 가면 또 아침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사과를 하겠지만 왠지 오늘은 조금 피곤하고 내일, 아니면 그냥 이대로 넘어가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약속 장소인 중국집에 들어서자 바로 맛있는 기운이 느껴졌다.

아주 좁은 4인 테이블에 앉으면서 이제 곧 메이님과 대표님이 도착하면 서로 어깨가 닿고 머리를 맞대고 뜨거운 만두를 먹겠지 생각하고 있을 때, 긴 코트에 모자를 쓴 중년 여자와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젊은 여자, 그리고 뿔테안경을 쓴 젊은 남자가 함께 들어와 내 앞 테이블에 앉았다.

내가 방금 상상한 걸 눈앞에서 시연하는 것처럼 셋이 꼭 붙어 앉아서, 찐만두랑 군만두랑, 선생님은 뭐 드시고 싶으세요? 젊은 여자가 중년 여자에게 묻고, 부추잡채를 먹을까? 중년 여자가 말하자, 네 좋죠! 여기요! 하면서 젊은 여자가 주문을 하고 이어서 중년 여자가 고량주도 하나 주세요라고 했다.

 

 

오는 길에 연희예술극장을 보았기 때문에 셋은 배우이거나 연출자 아니면 스텝일 것 같다고 단순한 추측을 하고 있을 때, 두툼하고 노랗고 따뜻해 보이는 점퍼를 입은 메이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곧 대표님도 도착해서 우리도 군만두 두 개랑 찐만두 하나 그리고 탕수육을 시켰다. 메이님이 칭따오 하나 시킬까요? 기분 좋게 말했고 나는 밖에서는 술을 못 먹지만 그래도 오늘은 마시고 싶어서 메이님이 알맞게 따라 준 두 모금, 아니다 세 모금인가? 마셨다.

군만두 두 접시가 먼저 나오고 탕수육이 나오고 정말 맛있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할 정도로 맛있게 다 먹을 때까지 찐만두는 오지 않았고, 셋 다 배가 불러서 그냥 말하지 말자고 했다.

 

 

카페로 자리를 옮겨 내년에 나올 책 계약서에 먼저 사인을 하고 이야기 나누는 틈틈이, 나를 스쳐 간 몇 번의 순간들이 떠올랐다. 어떤 시기마다 마치 나를 기다린 것처럼 나타나 손을 내밀던 사람들을 너무 차갑게, 어떤 때는 알아보지 못하고, 또 아직은 아닌 것 같아요 하며 지나쳐버린 순간들 말이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나를 어딘가로 데려다 놓는 이 간절함의 씨앗이 바로 나라는 것을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고 이제는 그 마음이 너무 커서 감출 수도 없다.

비록 계약서에 아름다울 미 한자를 틀리게 써 버리긴 했어도... 美...

 

 

 

 

 

그러고 보니 어릴 때는 내 이름이 너무 싫고 부끄러웠는데 그건 아마 부모의 애정이 들어가지 않은 그냥 막 지은 이름일 거라는 망상에 빠져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제는 그런 생각은 그다지 내 인생에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데 어쩌면 그런 괴로움을 이겨내고 싶어서 내가 나를 더 정성스럽게 부르고 또 대답하고 그러는 동안 오히려 촌스러운 이름에 매력을 느끼는 인간으로 다시 빚어진 걸 수도...

메이님 말처럼 정말 만옥으로 책을 낼까... 미옥보다는 만옥이 좀 더.. 풍성하지 않나? 황만옥... 하지만 만옥이 되려면 더 일찍 한참 전에 벌써 만옥을 반죽해 두었어야 해...

 

 

역까지 걸으면서 메이님과 대표님에게 아까 아침에 철운하고 싸운 이야기를 했다. 에이 왜 그랬는지 알지만 그래도 철운님 화는 내지 말지 하면서 메이님이 약간은 내 편을 들어주니까 신이 나기도 했는데 계속 들리던 대표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아 돌아보니 저쯤에서 열심히 가방을 뒤적이고 계셨다. "저 아무래도 화장실에 핸드폰 두고 온 것 같아요..."

 

 

우리에게 먼저 가라고 한 대표님은 다시 되돌아 카페로 향했고 메이님과 나는 3번 출구 앞에서 그럼 목요일에 춘천에서 만나요 하고 헤어졌다.

철운에게 전화해서 이제 용산으로 가고 있다고 그리고 아침에 너랑 싸운 거 좀 전에 얘기했는데 얘기 끝나자마자 대표님 핸드폰 두고 와서 다시 카페로 가셨다? 했더니, "사실은 나도..." 그러면서 철운이 고백을 했다. 너한테 그렇게 큰소리쳤는데, 너 먼저 현관 열고 나갔잖아, 근데 와, 씨 나도 핸드폰 어딨는지 한참 찾았다... 아무튼 시간 맞춰서 역에 가 있을게...

 

 

 

 

하루를 정리하면서 잠깐 눈을 감았다 뜨니 벌써 청평을 지나고 있고... 아침에 못 본 오하아사를 이제서야 보는데 오늘의 럭키 컬러가 오렌지였어? 너무 소름이다 카페에서 커피컵도 오렌지색이었고 대표님이 쓰신 펜도 오렌지색이었고 메이님이 사 준 도너츠 박스도 오렌지색?? 아니 이런 일이... 주르륵 스토리에 올리다 보니 어느새 -춘천?이라는 소리와 함께 내가 있던 칸의 모두가 우르르 빠져나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일어나 함께 섞여서 기차에서 내리고 계단을 또 내려가다가...???! 내려가??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이런...

 

철운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하, 알았어 남춘천으로 갈게.

응...

그때 마침 행선기에 방금 지하철이 굴봉산역에 도착했다는 안내가 떠서 다시 철운에게 그냥 거기 있으라고 지하철 타고 가겠다고 했다. 30분을 기다려 지하철 타고 춘천역에 도착해서 저쪽 길가에 우두커니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일 년이 넘도록 초보 운전 종이를 떼지 못한 겁 많은 레이를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