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9 17

 

아침 일찍 고구마 전을 부치고 일단 싱크대 위를 한 번 깨끗하게 민 다음 커피를 내리고 티비도 보면서 쉬다가 다시 동그랑땡을 부치고 또 말끔히 치우고 낮잠을 잤다. 그리고 일어나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새로 산 무쇠 그리들을 꺼내 메밀전을 시작했다. 다 끝내고 시계를 보니 밤 열 시였다. 내 주방에서, 온전히 혼자, 이렇게 운영해 본 것은 처음이다.

 

 

지금까지는 대형 전기팬 가득히 우르르 올리고 빈자리가 나는 대로 채워가며 탄 곳은 소주로 닦아 복구한 뒤 계속해서 다음 전을 부쳐나갔는데, 손이 느린 나는 매번 그 속도를 따라가다 결국 망해버린 기분으로 포기하듯이 해치우게 되고, 그러고 나면 한동안 그 망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괴로워한다는 걸 이제는 고백해야 했다. 다른 복잡한 감정이나 사정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내 속도에 맞게 천천히, 내가 짜 놓은 열을 유지하고 싶은 것뿐이다.

 

 

망해도 괜찮아.라고 생각하는 나를 만들고 싶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것 같은데, 그게 또 맘처럼 되지 않아 인생이 두 배로 괴로워진 거지. 나는 나고 내가 난데... 그러니까... 언제나 내 망함의 기준은 결과물이 아니라 마음 상태고 마음이 불안하지 않으면 나는 망하지 않은 거니까, 이런 나를 계속 굴려가며 열심히 덧붙이고 그런데 기왕이면 잘 고르고 깁는 노력을 쏟아서, 나를 불안하지 않게 하는 완벽한 도구를 찾아 손에 쥐면 되는 거였다.

 

 

아마 내 또래 중에 이렇게 얇게 부칠 수 있는 사람 없을걸! 하고 으스대자, 그래 메밀전 어려운데. 여긴 할머니 돌아가시고 이제 안 부치니까. 하면서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 야, 그냥 그림 때려치우고 전집 차려라?

상반기의 나였다면... 전화를 끊고 한동안 저 밑바닥에 보란 듯이 엎어져 괴로워 하고 있겠지만 오늘은 그런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올 추석의 나는 그야말로 대단했고, 이 영광은 오늘로 끝이야.

 

 

오래 굳어진 것을 스스로 깨트리며 나아가는 사람들의 선택이 부럽고 멋져 보일 때 나는 그들의 선택을 부러워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부지런함을 보고 배워야 하는 거였다. 아마도 내가 걷기로 마음먹은 길은 어느 순간 멈춰 선 곳에서 그 자리를 바라보고 나서야 알게 되는 그런 길이었던 것 같은데. 거기서 끄덕일 수 있으면 그걸로 됐다고 믿는.

 

 

약간의 수정이 필요하다. 조금은 나아가기 위해서.